시라토리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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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토리 도시오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정보부장, 주 이탈리아 대사 등을 역임했다. 만주사변 당시 국제 연맹 탈퇴를 주도하고,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조약을 추진하는 등 일본 군부와 협력하여 강경 외교를 펼쳤다. 태평양 전쟁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복역 중 사망했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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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 도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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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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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시라토리 도시오 |
출생일 | 1887년 6월 8일 |
출생지 | 지바현, 일본 제국 |
사망일 | 1949년 6월 3일 |
사망지 | 스가모 형무소, 도쿄, 점령하 일본 |
국적 | 일본 |
직업 | 대사, 외무대신 고문 |
형벌 | 사망 |
죄목 | 평화에 대한 죄 |
재판 | 극동 국제 군사 재판 |
2. 생애
1912년 지바현에서 태어난 시라토리 도시오는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13년 외무성에 들어갔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 연맹 탈퇴 등 일본 군부와 협력하여 영국, 미국에 대한 강경 외교를 추진하였고, 1938년 주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되어 삼국 동맹 체결을 도모하였다.[11]
태평양 전쟁 이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시라토리는 외교관, 정치인으로서 만주사변 옹호, 국제연맹 탈퇴 주도, 삼국동맹 추진 등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태평양 전쟁 발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 초기 생애 및 외교관 경력
1912년 7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13년 10월 고등 문관 시험,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무성에 들어갔다. 이후 펑톈, 홍콩에서 영사관보로 근무했으며,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워싱턴 D.C.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외무성 내 정보부가 설치되자 마쓰오카 요스케, 히로타 고키 등 역대 부장 밑에서 정보부원으로 근무하였다. 워싱턴 회의 수행원도 맡았다. 1930년 외무성 정보부장이 되어 만주사변 당시 내각 서기관장이었던 모리 가쿠와 당시 일본 육군 중령이었던 스즈키 데이이치와 제휴, 국제 연맹의 비판에 맞서기 위한 외교 정책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였다.2. 2. 만주사변과 국제연맹 탈퇴
1930년 정보부장이 된 시라토리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직후 사변 옹호 입장을 가장 먼저 드러냈다.[11] 당시 내각 서기관장이었던 모리 가쿠 및 육군 중좌였던 스즈키 데이이치와 협력하여,[11] 국제 연맹의 비판에 맞서기 위한 외교 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에릭 드럼몬드 국제연맹 사무총장이 일본 측에 은밀히 조정안을 제시했을 때, 시라토리는 독단적으로 이를 공개하며 국제 연맹의 어떠한 조정도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드럼몬드는 불쾌감을 표했고, 국제 연맹 일본 대표부는 곤혹스러워했다.[11]
1933년에는 시데하라 외상이 금주로 진격하지 않겠다고 미국 국무부 장관헨리 스팀슨에게 전달했고, 미국 측이 이를 "일본이 금주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라고 발표하여 문제가 된 "시데하라 외상 군기 누설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시라토리는 미국 측의 발언을 비난하며, "눈이 멀었다(see red)"라는 매우 강한 표현으로 스팀슨을 비난했다.[11] 이 때문에 주미 일본 대사가 스팀슨에게 유감의 뜻을 표명해야 했다.[11]
시라토리는 만주사변을 좌관급 십수 명이 육군 수뇌부를 끌어들여 일으킨 것으로 보았고, 초기에는 만주 독립에 대한 열강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부정적인 입장이었다.[11] 그러나 사변 이후 "법화경이나 사서오경 등 낡은 것만 보고 있다"라고 하며, "아시아로 돌아가라"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11] 야마모토 가츠노스케는 시라토리가 직무상 군과 접촉이 잦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반미·반국제 협조적인 사상을 가진 군 관계자들과 동조하며 환심을 사려 했으나, 점차 그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분석했다.[11]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이 붕괴되고 이누카이 내각이 성립되자, 시라토리와 친하고 "아시아로 돌아가라"라는 말을 사용하던 모리가 내각 서기관장이 되었다. 모리의 주도로 대만몽(滿蒙) 실효책 심의회가 설립되었고, 시라토리는 외무성 대표로 참여했다.[11] 또한 시라토리는 외무성 내부에 참모 본부와 같은 외교 정책 검토 기관인 "고찰부" 설립을 주장하여 일부 젊은 관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모리나 스즈키와 빈번하게 요정에서 회담을 가졌으며,[11] 특히 모리와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모리가 "시라토리는 어떻게든 자기 말대로 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11]
1932년 만주국 승인 문제에 대해 시라토리는 "별로 서두를 필요도 없어, 운하를 파는 것도 아니니까"라고 해외 기자에게 말하는 등,[4] 미국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11] 주일 미국 대사는 시라토리를 "악마(evil genius)"라고 평가했고, 후임 조지프 그루 대사 역시 "자신의 독단이나 외무성 외부 인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외국 특파원에게 선정적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담화를 발표하는 것을 즐긴다", "극비 외교 회담 내용을 독단적으로 발표하고 잘못 요약한다" 등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1]
시라토리는 국제 연맹 탈퇴 등 군부와 협력하여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강경 외교를 추진하고 여론을 유도하는 데 힘썼다.[11] 그는 마쓰오카 요스케가 국제 연맹 탈퇴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에 대해 "마지막까지 탈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남으려고 했던 자"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11]
2. 3. 외무성 내 갈등과 좌천
시라토리는 의견이 다른 동료, 상사, 정치인에게도 극도로 공격적이었으며, 이누카이 내각에서의 상사 요시자와 겐키치 외무대신과는 견원지간이었다.[1] 의형 이즈부치 가쓰지에게도 비판적이었으며, 외무성 내에서 이즈부치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는 배후가 되기도 했다.[1] 특히 다니 마사유키 아시아국 국장과는 고사부 설립 문제로 심하게 대립했고, 1932년에 취임한 아리타 하치로 외무차관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아리타는 시라토리와 다니를 해외로 부임시켜 조정을 하려 했지만, 시라토리는 성내 혁신파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아리타에게도 해외 부임을 요구하도록 우치다 야스야 외무대신에게 압력을 가했다. 우치다는 시라토리의 압력에 굴복하여 아리타에게도 해외 부임을 요구했지만, 싸움 양쪽 모두 처벌의 형세가 된 것에 분노한 아리타는 차관직을 사임했다.[2]1933년 6월, 다니는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으로, 시라토리는 스웨덴 공사(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겸임)로 스톡홀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라토리는 이에 저항하여 부임을 꺼렸기에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차관이 면직하겠다고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2] 결국 시라토리가 스톡홀름을 향해 출항한 것은 9월 21일이 되어서였다.[3] 그 후 고사부 문제도 시게미쓰의 재정으로 순수한 조사 기관으로서의 조사부 설립으로 결정되었다.[2] 시라토리의 해외 출국 후, 국내에서 혁신파의 주도적 입장에 있던 것은 구리하라 다다시 조사부장 등이었으며, 시게미쓰 등에 대해 심한 비판을 가했다.
2. 4. 주 스웨덴 공사 시절 및 대기
시라토리 도시오는 1936년 방공 협정 성립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1] 하지만 영미를 견제하는 관점에서 방공 협정 자체에는 찬성했다.[1] 시라토리는 영미와의 대립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서는 강하게 경계하며 대소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소련과의 전쟁도 각오하고 교섭에 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2]외무성 중앙이나 유럽 정세와 동떨어진 스톡홀름에서의 근무에 싫증을 느낀 시라토리는 여러 차례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여비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고, 시라토리는 자비로 귀국하겠다고 하여 갈등을 빚었다.[3]
1936년 11월, 정식 귀국 명령이 내려졌고,[4] 12월 하순에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약 2년 동안 한직에 있었다. 이 시기에 시라토리는 활발한 언론 활동을 통해 다양한 논설을 발표했다.[4] 중일 전쟁에 대해서는 일본과 서양에 의존하는 중국 간의 사상적 대립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측도 그 진의를 중국 측에 전달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지적했다.[5]
일독 협력 강화를 주장하는 젊은 외무 관료들 사이에서는 "시라토리를 외무 차관으로 임명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외무성 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 주독 대사 오바타 토요키치는 외상 취임을 요청받았을 때, 젊은이들이 시라토리를 차관으로 추천하자 외상 취임을 거부할 정도였다. 오바타는 시라토리가 모리와 아카사카에서 술을 마시며 외무성 공금으로 기생에게 아이를 낳게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기도 했다.[6] 1937년 3월 30일에는 연회 자리에서 시라토리가 팔걸이를 오바타에게 던져 부상을 입히는 사건까지 발생했다.[7]
시라토리는 이 시기 논설에서 일본이 인민 전선 제국(공산주의·자본주의 제국)과 적대하는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브라질과 같은 "파쇼 그룹"과 공통점이 있으며, 오히려 일본이 그 본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8] 또한 일본의 신도는 "천황교"라고도 할 수 있는 "우주 종교"이며, 인민 전선 제국과 전체주의 제국 간의 대쟁투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9] 시라토리의 과격한 주장에 고노에 후미마로는 "과대 망상증에 걸린 것 같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10] 사이온지 긴모치의 비서 하라다 구마오는 시라토리를 책임 있는 지위에 앉혀 오히려 온건하게 만드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0]
1938년에는 히로타 외상이 신설 예정인 대중국 정책 기관의 장관으로 시라토리를 임명하려 했으나, 히로타가 해임되면서 무산되었다.[11] 히로타 해임 후에는 다시 외무성 내 젊은이들 사이에서 시라토리를 차관으로 옹립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동아 국장 이시이 이타로는 이를 "성내 나치당"이라고 불렀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신도 시라토리를 차관으로 기용할 것을 요구했고, 7월에는 오카와 슈메이가 시라토리 기용을 요구하는 외무성 젊은이들의 연명장을 우가키 가즈시게 외상에게 제출했다. 또한 젊은 관료 7명이 우가키의 사저를 방문하여 시라토리의 차관 기용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리우치 겐스케 차관을 해임할 생각이 없었던 우가키는 응하지 않았다.
우가키는 대신 주 이탈리아 대사 자리를 제시했다. 시라토리는 즉시 승낙하지 않고, 추천자로 여겨지는 고노에의 집으로 갔다. 고노에는 대신이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해 대사가 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고, 9월 22일에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9월 29일, 우가키 가즈시게 외상이 흥아원 설치 문제로 사임하자, 다시 시라토리 옹립의 목소리가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 높아졌다. 외무 사무관 우시바 노부히코는 형 우시바 도모히코 수상 비서관을 통해, 시라토리를 대신으로 추천하는 50명의 외무 관료 서명이 들어간 연판장을 고노에 수상에게 제출했다. 내각 비서관장 카자미 아키라는 시라토리를 대신으로 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해군 대신 요나이 미츠마사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노에는 시라토리를 불러 "내외의 사정으로 지금은 그대를 대신으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라토리는 외상으로 "아리타(하치로)가 가장 사심이 없어 좋다"고 하며, 자신의 동조자인 구리하라 타다시를 차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 역시 관저와 외무성 내의 반발을 받아 구리하라는 동아 국장에 머물렀다. 시라토리는 이 움직임이 결정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지만, 11월에 일본을 떠나 이탈리아로 부임했다.
2. 5. 주 이탈리아 대사와 삼국 동맹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추천으로 주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된 시라토리 도시오는 오시마 히로시와 함께 일본·독일·이탈리아 간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11] 시라토리는 방공 협정 강화, 즉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을 지지했다. 이탈리아 부임 전, 동맹에 반대하던 숙부 이시이 기쿠지로에게 "숙부의 외교는 낡았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러나 삼국 동맹에는 반대 세력도 많았고, '엷은 먹빛 외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아리타 하치로 외무대신은 적극적인 추진 의사가 없었다. 일본 정부는 동맹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며, 영국과 미국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와의 연계를 통해 견제하는 정도의 의미로 한정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은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 일반적인 동맹을 요구했고, 시라토리와 오시마는 이를 지지했다. 시라토리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허위"를 독일에 강요하면 "제국의 도의적 외교"에 흠결이 생긴다며, 일본 측의 목적 달성보다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요구에 따라 동맹 체결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섭이 정체되면, 본국으로 소환을 요청하며 본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본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시라토리 등에게 약간 양보하여, 동맹은 기본적으로 소련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설명하도록 훈령했지만, 시라토리 등은 이마저도 무시했다. 요나이 해군은 "정부의 위신은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대사는 마땅히 사임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정치 상황은 양 대사를 파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한탄했다. 쇼와 천황은 5상 회의 구성원들의 念書를 제출받았으나, 시라토리 등은 훈령을 확대 해석하여 독일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선전할 경우, 일본도 선전한다고 명언했다.
이에 천황은 시라토리 등의 행위가 천황 대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격노했다. 요나이 해군은 양 대사를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라누마 기이치로 총리는 소환해도 소용없다고만 말했다. 아리타 외상도 일본 외교를 운영하는 것은 시라토리와 오시마라고 그루 미국 대사에게 털어놓았다. 이후 5상 회의는 시라토리와 오시마에게 훈령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하고, 동맹 교섭은 정체되었다.
교섭 지연에 초조해진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은 1939년 4월 20일 "일본과의 동맹 체결이 너무 난항하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다"는 협박성 발언을 했다. 오시마는 단순한 허세로 받아들였지만, 시라토리는 이를 본격적인 경고로 받아들였다. 8월에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자 삼국 동맹 교섭은 일단 백지화되었지만, 시라토리는 이때부터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소련을 더한 동맹 관계, 즉 "독-일-이-소 4개국에 의한 유라시아 블록 구상"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라누마 내각이 총사퇴했고,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다음 내각의 과제로 "일체의 청소를 단행"하고, "오시마·시라토리의 무리를 소환하는 것을 옳게 여긴다"고 말했다. 신임 노무라 기치사부로 외무대신은 시라토리, 이어서 오시마를 소환하고, 혁신파인 구리하라를 스위스 대사로 전출시켰다.
2. 6. 개전 전후의 활동
시라토리는 1939년 9월 2일에 귀국 명령을 받고 같은 달 중순에 나폴리를 출발하여 10월 13일에 귀국했다.[1] 시라토리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이 배신했다고 매우 분개하고 있는 듯하지만, 독일을 나무라는 것은 심하다. 자세한 사정을 알면 동정해야 할 점도 있다", "일본에도 책망받을 점이 있다"고 독일을 옹호했다.[2][3] 일본에서는 시라토리가 협상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소의 접근을 사전에 경고했음을 주장하며 활발한 강연·집필 활동을 했다.[3][4] 또한 볼셰비키도 동맹 가능한 상대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전부터의 반공주의자로서의 입장을 바꾸었다.[5] 이러한 언행에는 시라토리와 비슷한 주장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6]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독일이 유리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연에서는 이러한 희망적 관측을 담은 발언을 했다.[7]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이 빠르게 진격하자 시라토리는 "신질서"가 도래한다고 주장하며, 독일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우리나라 상층부"를 비판하게 되었다.[8] 1940년 7월에는 요나이 내각이 무너지고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발족했다. 요나이 내각 말기에 고노에가 총리가 되고, 시라토리가 외상이 된다는 소문을 요나이가 들었던 것처럼, 시라토리 외상을 기다리는 목소리가 많았다.[9] 그러나 천황이 시라토리의 외상 취임을 반대했기 때문에,[9] 외상이 된 것은 한때 시라토리의 상사였던 마쓰오카 요스케였다. 마쓰오카는 시라토리의 후견인이었던 모리 가쿠와도 친했지만, 모리가 마쓰오카의 은인 야마모토 조타로와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시라토리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0] 고노에와 육군은 시라토리를 차관으로 할 것을 요구했지만, 마쓰오카는 오하시 주이치를 차관으로 임명하고, 시라토리에게는 외무성 고문의 지위를 부여했다.[9] 시라토리는 언론을 통해 점차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했는데, 영국이 참전한 것은 유대 자본가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유대인에게 지배당하는 미국과도 싸워야 하며,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1] 이 무렵 문화 친선 단체 "이탈리아 친구회"가 외무성의 외곽 단체가 되었고, 시라토리가 회장이 되었다.
1941년 4월, 시라토리는 조울증 치료를 위해 고문직을 사임하고, 이후 1년 동안은 입원과 요양 생활을 했다. 그 후, 1942년 4월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향인 지바현 제3구에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의 추천 후보로 입후보했다. 정원 4명 중 3위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우익 진영의 수령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았으며, 5월에는 익찬정치회의 총무로 추천되었다. 이탈리아의 항복 후, "이탈리아 벗의 모임"은 맹방 동지회로 개칭되었고, 시라토리는 이 회를 통해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언설은 기요자와 키요시가 "정신병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듯이, "신들린", "과대망상광", "아직 병이 낫지 않았다" 등으로 조롱받았다.
도조 내각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여, 1943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나 나카노 세이고에 이어 익찬정치회에서 탈퇴했다. 1944년에는 이 전쟁이 "사악한 신 여호와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에게 반역하는 행위", "여호와를 받드는 유대교 및 프리메이슨"의 반역 행위라고 발표했다. 또한 무 대륙이 실재했다고 주장하며, 세계의 인류는 모두 일본 민족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과 각 종교는 모두 일본에서 나왔다고도 말했다. 같은 해, 젊은 외무성 관료인 시게미쓰 외상 · 대동아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발생했는데,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이 운동을 선동한 자 중에 시라토리가 있었다고 한다.
2. 7. 전범 재판과 사망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시라토리 도시오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 금고형 판결을 받았다.[11] 1945년 11월 1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시라토리를 전쟁 범죄인으로 체포하여 스개모 형무소에 구금하라고 명령했다.[5]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중의원 의원을 사임했다.[6]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출두했지만, 후두암으로 인해 상당히 쇠약해져 있었다. 재판에서는 시라토리의 활발한 언론 활동이 전쟁을 부추긴 것이라고 지적되었고, 변호 측은 "일본의 괴벨스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판 후반에는 거의 결석했고, 종신 금고형 판결이 내려졌지만, 반년 후인 1949년 6월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1세였다.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 신사 합사제에서 다른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기타
- 쇼와 천황에 대해 "천황이 평화주의자인 것은 원로(사이온지 긴모치)나 내대신(마키노 노부아키)의 영향 때문이다"라고 비판적인 의견을 말했지만,[1] 전후 출두 전에 남긴 서간에서는 "선천적으로 평화를 사랑하신다"며 호의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2]
- 이탈리아 부임 전에는 북진론자였으며, "남방은 큰 잡초만 무성하다"고 주장했지만, 귀국 후에는 "북방은 툰드라다. 그것보다 남방이다. 바다의 자원, 산의 자원, 제국의 생명선은 남방에 두어야 한다"며 남진론으로 노선을 바꿨다.[3]
- 매우 적을 만들기 쉬운 성격으로, 여러 인물과 갈등을 빚은 일화가 있다.
- 이탈리아 부임 전에 동맹 통신사 사장 이와나가 유키치와 회의에서 다투다가 "이탈리아 대사가 될 인물"과 "국가 대표 통신사의 보스"가 양복을 벗고 싸움을 시작하려는 사태가 벌어져, 아리타 하치로 외상이 말렸다.
- 도쿄 재판 중 법정 대기실에서 하시모토 긴고로가 격노하여 시라토리가 안경이 날아갈 정도로 얼굴을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다만 하시모토 역시 사소한 일로 격앙되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 사망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또한 부인에게는 만년에 "여러 종교를 공부했지만, 기독교를 비롯해 어떤 종교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 한때 금광교 등 신종교에 빠져 자택에 신주단을 모시기도 했다.
- 한도 가즈토시와 시라토리의 삼남 요조는 구제 우라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으며, 권유로 재판을 방청하러 갔지만 "솔직히 전혀 재미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4]
참조
[1]
웹사이트
IMTFE Judgement
http://www.ibiblio.o[...]
2012-01-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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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4 Class-A War Criminals Enshrined at Yasuk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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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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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Emperor Showa spoke from the heart in his m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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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4
[4]
문서
パナマ運河 건설のため、アメリカがパナマをコロンビアから独立させたことを暗に示している。
[5]
뉴스
荒木・南・小磯・松岡ら十一人に逮捕命令
朝日新聞
1945-11-20
[6]
간행물
官報
1945-12-11
[7]
서적
日本の勲章 国の表彰制度
第一法規出版
1965
[8]
문서
法廷証第125号: 白鳥敏夫關スル人事局履歴書
https://dl.ndl.go.jp[...]
[9]
간행물
官報
1926-02-12
[10]
간행물
官報
1941-10-23
[11]
뉴스
히로히토 "이왕 시작한 전쟁 철저히 해야"
http://media.daum.ne[...]
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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